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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수도권

강서 양천향교역 || 서울에 웬 지방교육기관? (양천현 서울편입)

슈뢰딩거의 구름 2021. 9. 22. 06:06

다녀간 날: 2017.10.12

 

  서울 도시철도 9호선 양천향교역 | 역번호 906 |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로 (가양동) 소재 

  2009.07.24 개업 | 2승강장 2타는곳 (상대식, ㅁ||ㅁ) | 출구 8개소

 

[주변지도]

 

향교: 고려·조선 시대에 유교를 교육하기 위해 국가가 지방에 설립한 중등교육 기관. (두산백과)

우리는 향교에 대해 위와 같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600년 수도인 서울에도 향교가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 것일까요?

이곳은 예로부터 서울이 아닌, “경기도 양천현의 중심지로서, 이로 인해 향교가 설치된 것입니다. 비슷하게 옛 시흥의 중심지였던 금천구에도 시흥향교 터가 남아 있습니다.

 

 

[1. 승강장]

가양역에서 일반열차를 타고 바로 다음 역인 양천향교역에 내렸습니다. 승강장 자체는 따로 언급할 게 없습니다.

 

 

[2. 역명판]

그래도 좀 특이하다 할 만한 것은 역명입니다. 주변에 있는 문화유산 양천향교에서 따 왔군요. 향교라는 역 이름은 전국에서 여기가 유일합니다. 뭐 아마 붙일 이름이 다 떨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은 가양동에 있는데 정작 가양역은 옆에 있거든요.

 

하지만 오히려 이게 더 근본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가 옛 양천현의 중심지였다는 뜻이거든요. 지금의 서울시 양천구와 강서구에 해당하는 고을입니다. 양천이란 이름은 양천구가 가져갔는데 정작 옛 중심은 강서구가 먹은 것이 희한하군요.

 

 

[대동여지도 양천현 부근. 점선은 행정구역 경계]

이 지역은 고구려때는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때 율진군(栗津郡)이었다가 고려 말 충선왕 때 양천현(1319)이 된 지역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 양천현 편을 보면, 집은 222, 인군느 509명이라고 적혀 있내요. 양천이라는 이름은 밝은 태양과 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뜻입니다.

 

뭔가 고을 크기가 작은 거 아니냐? 싶긴 합니다. 사실 조선시대 호구조사는 세금징수를 목적으로 했기에, 실제보다 축소된 면이 크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반적인 고을 크기도 작은 것 같은데, 옆의 김포도 조선시대때는 김포와 통진으로 쪼개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수원은 지금의 수원에서부터 의왕 포함, 서해대교가 있는 평택까지를 포함하는 고을(수원부)였습니다. 대충 엄청나게 차이가 심하게 났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월경지(A 소속인 동네인데 A와는 떨어져 있고 B라는 동네에 둘러싸여 있음. 예를 들면 미국의 알래스카)도 무지막지하게 많았고요.

 

 

[일제강점기 기준 행정구역]

출처: 국서편찬위원회 한국지리정보

 

이 개판인 것을 해결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조선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필요가 있었던 일제였습니다. 이 중 1914 4 1,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고, 이를 부군면 통폐합이라 불립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사용하는 행정구역은 이 개편 결과와 거의 유사합니다.

 

 

[같은지도, 양천향교 부근]

부군면 통폐합으로, 우리의 양천현은 근처의 통진, 김포와 합체(!)해서 김포군 양동면, 양서면이 됩니다.

 

 

[서울 대확장]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하지만, 이것들은 서울의 발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1963, 이 지역은 이번엔강서구로써 서울에 먹혀버립니다. 송파, 강동, 강남(구 광주군), 금천, 관악, 서초(구 시흥군), 구로(구 부천), 도봉, 노원, 중량 (구 양주군) 지역이 이때 편입된 지역입니다.

이때 편입된 시흥군 동면 (현 금천구)도 양천현과 마찬가지로 시흥의 중심지였습니다. 시흥역, 시흥동, 시흥향교가 왜 시흥시에 없고 이 동네에 있었던 이유가 있는 겁니다. 지금의 시흥시는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육개장입니다. 이름에 개가 들어가고 유래도 맞지만, 지금은 소고기로 만드는 음식이잖아요.

 

[3 9호선 홍보물]

포스터(?)에 그려진 역이 바로 오늘 답사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뭔가 온 우주가 용기를 복둗아 주는 느낌이 들어 사진으로 담아봤네요. 참고로 오늘 출발점인 여의도역 바로 다음 역이기도 하죠.

 

 

[4. 대합실]

대합실입니다. 대합실보다는, 벽에 붙은 양천향교 홍보 포스터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5. 2,3,5,6,7,8번 출구 모음]

귀찮아서 5번출구와 1번 출구는 건너 띄었습니다. 1번출구는 양천향교 갔다 오는 길에 찍으려 했는데, 대충 찍어서 못 쓰는 사진이 나와버렸군요.

 

 

[6. 양천로 모습]

역 주변 모습도 있어야죠. 동네를 대표할 것만 같은 이름의, 강서로와 양천로가 교차하는 양천향교역 교차로에 역이 있습니다. 강서로는, 북쪽으로는 올림픽대교, 남쪽으로는 5호선 우장산-화곡역과 연결돠는 나름 큰 도로입니다. 하지만 뭔가 왜 한적해 보이죠??

 

 

뭐 역을 기준으로 네 블록으로 나누자면, 동북쪽은 CJ제일제당 공장이 있고, 남동쪽에는 답사 당시 공사 중인 마곡지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빌라와 아파트. 서울에 있는 역 중 중앙보다 살짝 밑에 속하는 역으로, 2019년 일일 이용객수는 17,448명으로, 적은 수치지만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7. 양천향교로 출발]

나름 이 역 답사에서 신경 쓴 부분입니다. 양천향교에 직접 가 보도록 하죠. 2번 출구로 나와서 주택가 골목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가 500m 걸으면 됩니다. 대충, 지도 없이 찾아가면 헷갈릴 수 있는 그런 난이도입니다.

 

 

[8. 향교 진입공간 - 홍살문과 외삼문]

향교는 성균관 산하의 국립 교육기관으로, 유학을 가르치고 성인들에게 제례를 올리는 공간입니다. 조선의 이데올로기인 유교를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교화와 교육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불교 국가의 사찰과 그 역할이 비슷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유교답게 건물 장식 같은게 없어 건물이 검소해요.

향교는 고을에서 중요한 기관이었고, 지방관은 우수한 인재를 천거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향교는 옜 고을 관아와 1~3리 (cf. 1리~400m) 정도로 가깝게 들어왔습니다. 만약 길을 가다가 향교가 있다?! 그러면, 이곳은 그 지역의 옜 중심이라는 것이겠죠? 모든 고을에 세워 졌지게 주로 고려 말 ~ 조선 초에 세워졌고, 어느 지역을 가나 구조가 거의 같습니다.

 

본 향교는 조선 초인 태종 11(1411)에 설립되었으며, 1980, 1986, 1994, 2007년에 보수 공사를 거쳤다고 합니다. 향교는 이게 이잖아요? 그래서 중요한 공간이라고 홍살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막 향교 주변에는 하마비 (대충 중요하니까 건방지게 말 타고 다니지 말고 내리라는 뜻)같은 것도 있는데, 본인이 못 본 것 같네요.

, 그리고 보통 향교 같은 곳에서는,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고, 왼쪽 계단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동입서출). 조선 왕릉 같은 곳들도 그렇습니다. 현대에 들어 우측통행을 강조하며 생긴 풍속은 아니고, 유교의 예일 것입니다. 이유는 모르겠네요.

 

 

[12. 비석들]

양천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것입니다.  고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17~18세기 양천현감들의 선적비를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취지대로라면 원래대로라면 남이 세워줘야 하는 것이다만, 과연,,,

 

 

[13. 명륜당 일원]

대충 향교의 구조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약간 TMI지만, 한번 알아주면 향교 갈 때마다 써먹을 수 있어요,

외삼문을 통과하면 가운데와 양쪽에 건물이 있습니다. 향교는 교육과 제사를 지낸다고 했죠? 이에 따라 향교의 공간은 배움(강학)의 공간과 제례(제항)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제례 공간의 가장 큰 건물은 대게 대성(大成)전이라 불리며, 학습 공간의 주 건물은 명륜(明倫)당이라 불립니다. 서울 성균관 문묘도 같은 명칭이며, 이곳도 같은 명칭입니다.

대부분의 향교에서 두 공간은, 향교의 주축을 기준으로 위-아래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앞쪽에 오느냐는 것에 대한 규칙은 없으며, 대성전이 앞에 오면 전묘후학(前廟後學), 명륜당이 앞에 오면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라고 부릅니다. 서울 성균관(서울문묘)은 전묘후학, 이곳 양천향교는 전학후묘네요.

 

이곳은 유생들이 교육을 받던 장소입니다. 동쪽과 서쪽에 있는 건물은 동재, 서재로 불리며 기숙사 역할입니다. 수업은 중앙에서 받았습니다. 학생 정원은 법으로 정해져 있었는데요, 유수관은 50명, (대)도호부와 목은 40명, 지는 30명, 현은 15명이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향교 운영을 위한 밭도 갖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교육, 전통혼례 등등의 목적으로 활용된다고 하네요!

 

 

[14. 명륜당 석축에 적혀있는 돌판]

해석은 귀찮습니다.

 

 

[15. 대성전 일원]

건물 옆을 돌아 빠져나오면 언덕이 있고, 사당임을 알리는 태극 문양이 그려진 굳게 잠긴 문이 있습니다. 제례를 올리는 권위가 있는 장소니 만큼, 대부분 잠겨져 있어 개인이 혼자 방문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곳이죠. 저도 멀리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6. 뒤돌아서]

향교 자체가 한강을 등진 궁산 비탈면에 있어 경사가 있네요. 뭔가 상당히 높이 올라온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군요, (;;;)

 

제가 참고한 논문에서는, 향교에 모신 공자는 임금보다 높기 때문에, 조선 임금을 상징하는 삼각산(=북악산=청와대 뒷산)이 보이지 않게끔 북쪽에 산을 등지게끔 위치했다~ 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여튼, 당연히(?) 이 산은 공원으로, 올라가면 성벽 터와 정자(소악루)가 있어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판 땅굴 (궁산 땅굴전시관)도 있고요, 근처에는 겸재 정선 박물관과 허준박물관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안 갔느냐, 핑계를 대자면 어떤 건 몰랐고, 어떤 건 아직 개장 전이었으며, 어떤 거는 쉬는 날이어서 못 갔습니다.

옛 고을의 중심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볼 게 많군요. 나중에 공항철도 마곡나루역 답사할 때 한 번 다시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양천향교역 답사는 여기까지!

 

참고문헌

김규순, 옥한석, 박현규. (2018). 조선시대 향교의 지리적 입지와 배치방향-한양근교 향교를 중심으로-. 한국사진지리학회지, 28(4), 1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