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날: 2017.01.21
서울도시철도 5호선 천호(풍납토성)역 | 역번호 547 | 서울 강동구 천호대로 (천호동) 소재
1995.11.15 개업 | 2 승강장 2타는곳, ㅁ||ㅁ) | 출구 10개소
서울도시철도 8호선 천호(풍납토성)역 | 역번호 811 | 서울 강동구 천호대로 (천호동) 소재
1999.07.02 개업 | 2 승강장 2타는곳, ㅁ||ㅁ) | 출구 0개소
한민족의 수도 서울. 한반도 제1도시 서울은 2000년 전부터 백제의 수도로 역할을 다 해 왔던 유서깊은 곳입니다. 지금의 서울의 중심하면 종로, 아님 강남일대일 것입니다. 하지만. 2000년 전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서 있는 이 곳, 송파구 일대가 서울의 중심이였거든요. 그리고 이 곳에는 이천년전 벡제와 현재 2020년을 이어주는 소중한 열차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풍납토성입니다. 빨리 오세요. 곧 열차가 출발하려고 하니까요.
S#.1 이번역은 강동구 천호동에 위치한 환승역인 천호, 풍납토성 역입니다.
◈ 천호역 승강장 이모저모
강동역에서 전철을 타고 찬호역 승강장에 첫 발을 내딛였습니다. 내리자 마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아 이 역은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그리고, 평범한 상대식 승강장이군요. 그리고 이따 가 볼 8호선 승강장도 역시 섬식 승강장입니다.
벽에 붙은 천호역 역명판. 천호역은 강동구와 송파구 경계에 있는 5호선과 8호선의 환승역입니다. 천호라는 이름, 집 1000체를 연상시키는 독측한 지명이지만, 그 유래에 대해서는 상당히 추측이 난무한 상태입니다. 그나가 가장 공신력 있어 보이는 천호동 홈페이지에서는 민가 수 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른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5호선 승강장에서 계단으로 한 층만 올라가면 다음과 같은 넓은 대합실이 나옵니다. 상가도 닫쳐 있고 뭔가 썰렁한 느낌이 드는군요. 저 녹색(?) 계단을 올라가면 개찰구가 있는 지하 1층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가야 할 곳이 있어 저곳으로 올라가지는 않겠어요. 다른 곳으로 올라갈 것이거든요.
S#.2 방화나 상일동, 마천, 암사, 모란방면으로 가실 고객께서는 이번역에서 쉽게 갈아타실 수 있습니다.
◈ 선견지명 개념환승역 천호역
5호선 천호역 승강장을 둘러 보면 딱 봐도 수상하게 생긴 길이 승강장과 수직으로 나 있습니다. 바로 5호선과 8호선의 환승통로입니다.
천호역은 환승 동선이 짧아 환승하기 편한, 일명 '개념환승'으로 불리는 역입니다. 천호사거리 아래 5호선과 8호선이 만나는 지점에, 서로의 승강장을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반원 모양의 공간을 만든 뒤, 반원 모양의 벽을 다라 둥근 계단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방향이든 계단 1번이면 쉽게 환승할 수 있습니다.
먼저 지어진 5호선이 8호선보다 밑에 있는 것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일부러 5호선이 지어질 때 8호선도 같이 계획되었기 떄문에 이를 알고 이렇게 지어진 것입니다. 5호선 천호역 대합실 바로 위를 지나는 천호지하차도도 이 때 같이 공사했다고 5호선 건설지에 나와 있습니다. 훌륭한 선견지명인 셈이죠.
S#.3 천호역 일대는 부도심을 이루고 있어 상당히 혼잡합니다.
◈ 천호역 대합실
8호선에서 나온 승객들이 출구쪽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천호역의 특이한 구조는 동선이 짧아지는 효과도 있습니다만 문제도 하나 있어요. 저 반원 형태 공간에 환승통로와 대합실간 연결통로가 다 들어있다는 점인데 천호역 일대가 서울 동부 부도심 중 하나라서 쉽게 혼잡해 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5호선+8호선의 일일 이용 승객수는 8.2만(2019년 기준, 환승객 미집계, 서울교통공사발표)으로 매우 많은 편에 속합니다. 일단 8호선만 해서 8호선 1위인데다가, 합치면 상위 6% 내에 드는 역입니다.
(2018년기준, 한국교통안전공단 국가대중교통DB https://www.kotsa.or.kr/ptc/app/ 참조)
저 승객들이 다 빠져나오기를 기다린 뒤, 저도 지하 1층 대합실로 올라왔습니다. 그나저나 여기로 가면 8호선, 5호선을 둘다 빠르게 탈 수 있지만 개찰구 위 안내표시판에는 8호선만 안내하고 있습니다. 승객 분산을 위해서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천호역의 구조를 알게 된 이상, 앞으로는 거리가 짧은 이 개찰구만을 이용하자교요!
천호역 사거리 아래를 원형으로 파 만들어진 지하1층 대합실. 상당히 어둡습니다. 하지만 제가 작년 여름에 우연히 다시 이 동네에 오게 되었을 때는 엄청나게 밝은 조명을 달아 환해졌더라고요. 물론 사진은 없습니다.
한편 이 원형 공간의 한쪽에는 이렇게 5호선만을 안내하는 개찰구도 존재합니다. 아까 맨 처음 올라갈까 망설였던 그 대합실 공간과 이어지는 곳입니다. 물론 여기는 내려가면서 8호선 승강장을 들르지 않고, 거리도 약간 깁니다. 그러나 8호선 개찰구에는 없는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8호선 승강장을 거치지 않아 덜 혼잡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자로 다닐레요.
◈ 천호역 주변 이모저모
가볍게 8,7,6번출구를 둘러봤습니다. 천호역 사거리에 현대백화점 천호점이 웅장하게 서 있습니다.
반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지하도를 이용중입니다. 천호역에 환승주차장이 있습니다. 이것도 천호역 건설하면서 지었다고 하는데, 천호대로 상 5,6번출구 근처에 진출입로가 천호역사거리 방향으로만 나 있으니 참고하시라고요!
이번에는 현대백화점 앞에 있는 5,4,3번출구와 그 앞 도로(올림픽로). 백화점 앞 답게 행인도, 자동차도, 버스도 무지막지하게 많은 곳입니다. 출구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이 멈춰야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어요.
좌회전신호인 틈을 타서 찍은 천호역사거리 풍경. 좌-우는 천호대로, 앞-뒤로 올림픽로입니다. 그리고 천호대로를 따라 천호지하자도가 있어요. 여담이지만, 원래 천호대로는 종로와 하남을 잇는 큰 길로써 하남 BRT라 불리는 버스전용차로가 있거든요. 근데 천호지하차도 때문에 이 버스전용차로가 천호역 일대에서 잠시 끊깁니다.
그나저나 천호대로 이름에 이 동네 이름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이 동네의 지역 중심지로써의 위상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네요.
마저 1,2번출구도 찍었습니다. 이쪽도 적당히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출구가 섞여 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넌 뒤, 다시 천호대로 쪽을 찍어봤습니다. 신호 덕에 차들이 많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천호지하차도가 보입니다. 그리고 사진 방향으로 쭉 가게 되면 천호대교입니다. 아, 그리고 도로가 살짝 구부러져 있는데, 바로 풍납토성을 피해 가기 위해서이죠.
그래서 풍납토성은 근처 아파트 모양도 이상하게 바꿔놓았습니다. 문화제 기준으로 상공으로 45도를 그은 선보다 낮게건물을 지어야 하는 법적 규정때문에 계단 형태의 아파트를 천호역 인근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씨티극동아파트)
천호역 10번출구. 뒤로 길게 늘어선 자동차 행렬과 뒤로 현대백화점 천호점이 보입니다. 그나자나 유동인구가 많아서 출구 사진찍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나저나 9번출구 사진을 안찍었네요. 뭐 상관 있겠습니까?
S#.4 풍납토성으로 가실 고객께서는 이번역에서 하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이천년전 백제로 우리를 데려다 줄 열차, 풍납토성
본론이죠. 사실 이 역의 병기역명(필수 표기 부역명)이기도 하자, 이 포스팅의 진주제인 몽촌토성을 다룰 것이거든요. 이 역은 나름 이름에 충실한 역입니다. 천호사거리 자체는 송파구 풍납동, 성내동, 강동구 천호동의 경계이기에 '천호'라는 이름이 살짝 무색할지 몰라도, (그래도 천호동 자체가 상권이 발달한 곳) 풍납토성은 아주 가까히 있거든요. 위에 보이는 10번출구로 나와서 50m만 걸으면 됩니다.
이게 바로 풍납토성의 모습입니다. 단순한 흙더미로 보이신다면 아직 문화재를 보는 눈이 부족... 한 것은 아니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단순하게 생겼거든요. 너무나도 그냥 지나치기 쉽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래봐도 2000년 세월을 견뎌온, 2000년전 한성백제와 대화할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라고요.
◈ 운명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다. 풍납토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풍납토성은 백제의 왕성으로 조명된 지 100년도 되지 않는 토성입니다. 아니 2000년 백제라면서 무슨 100년이야 라고 생각하실수 있겠지만은 맞아요. 그냥 이 동네에 있는, 반쯤 허물어가는 토성 중 하나였습니다. 1918년 기준 이미 서측 벽은 다 허물어졌고, 남축, 동축, 북쪽벽만이 남아있었습니다. (2)
늘 그랬듯 운명은 정말 사소한 것으로 부터 시작했습니다. 때는 1925년, 이 일대를 떠들석하게 잠궜던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난 것이죠. 한강 물길이 바뀌었을 정도로 엄청난 홍수였다고 해요. (2) 근데 여기서 문제가 뭐였냐면 한강물이 휩쓸고 지나간 땅에서 갑자기 뜬금없이 청동제 초두, 금귀걸이, 수막새가 다량으로 발견됩니다. 딱 봐도 삼국시대 유물 이름처럼 생겼잖아요. 난리가 났겠죠. 일단 문화제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34년, 일본인 학자 야유카이 후사노신이 뜬금없는 주장을 해옵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비추어 볼때, 이곳이 바로 한강 위례성이라고 한 것이죠. 이에 힘얻어 1936년 일본의 문화제로 지정됬습니다. 하지만 당시 주류는 이곳을 위례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 개발독재! 문화재는 안중 밖
늘 그랬듯 개발독재시대에서 문화제 복원은 늘 안중 밖의 일이었습니다. 천호대교도도 1971년 서울시에서 풍납토성 성벽을 허물고 지을려다가 이듬해 문화부에 발각되어 재설계되었고, 올림픽대교 남단도 풍납토성을 허물려다가 문화공보부의 반대로 부랴부랴 우회해서 지었습니다. (2)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도로 공사한다고 흙을 퍼내고 성을 깎아 도로를 냈습니다.
그리고 개발도 잇따랐습니다.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됬지만 '성벽'만 지정되었기에 가능했어요. 게다가 1969년에 일부 지역의 사적 지정을 취소하는 짓도 벌이더군요. 성벽 안밖은 도시로 변해갔습니다. 1980년대에 이 일대가 집중침수지역이 되면서 정부가 보상책으로 잇다라 재개발을 허용해서 여러 아파드들도 들어섰어요.. (4)
일반 시민들은요? 문화재에 몰상식한건 정부뿐만 아니었습니다. 막 토성을 허물고 밭을 경작하고 무허가 건물을 지었다는 기사가 1981년에 나왔습니다. 근데 1994년 9월 기사에도 같은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10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나아진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5,6)
발굴은요? 1964년 서울대학교 김원룡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일부분을 발굴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큰 발굴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1970년대 3차례에 걸쳐 446m 해당되는 성벽을 복원되고 철제 담장을 치는 공사를 했지만 현지조사와 일부 전문가의 의견에 의존한 형식적인 복원에 그쳤죠. (2)
◈ 또 다시 찾아온 우연, 드디어 시작된 공연의 서막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은 문화제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1997년 1월, 평소 풍납토성에 관심이 많았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학생들과 풍납토성의 정밀 실측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이 일대를 둘러보던 중, 우연히 토성 안측 아파트 공사 현장을 들어가게 됩니다.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던 신우연립 제1지구 재건축 부지였어요. 그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하 4m까지 팠더군요. 그 아래쪽 깊은 곳 벽면에 새까맣게 탄 목탄층이 보였고, 수많은 기와와 토기 조각들이 금맥처럼 박혀 있었습니다…."라고 그 때의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백제라는 극의 거대한 서막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4,7)
풍납동 주민들에게는 악제였겠지만, 그 후로 대규모 발굴조사가 이뤄집니다. 1925년 을축년 홍수로 재발견된 이후 70년도 더 되서야 일어난 일입니다. 사실 이 토성은 그냥 흙을 엎어둔 것이 아니라, 진흙과 모래를 번갈아 단단하게 다진 판촉토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땅속 뭍혀있는 부분을 보니 최대높이 13.3m, 너비 43m, 둘레 3.5km에 달하는 토성이였다는 것도 밝혀졌어요. 3세기말에서 4세기 초, 4세기 말, 5세기 중반. 이렇게 세 번에 나누어 덧쌓았다고 합니다. 해자고 있었다고 해요.
이 정도 규모의 토성을 쌓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과 행청조직, 토목기술이 필요했을 터이고, 이곳은 왕성, 즉 하남 위례성일 것이라는 학자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났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유물 등에 대한 과도한 해석을 지적하며 무리하게 백제 초기의 왕성으로 비화됐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물론 발굴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주민들과 정부간의 갈등 상황이 벌어집니다. 2000년 5월 13일, 토성 안 강당연립 재개발 지역에서 보상이 늦어진다는 것을 이유로 지역 주민이 발굴현장을 굴삭기로 훼손하는 일도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효과로 풍납토성 내 규제만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지요.
성벽 안쪽에서도 재건축 공사를 활용해 여러 발굴조사가 일어났습니다. 거대한 건물 터, 충청도와 전라도의 토기가 담긴 우물, 기와를 얹은 건물 터, 8m폭의 자갈길. 중국의 값비싼 도자기까지. 아무리가 봐도 왕성같잖아요?
따라서 최근 학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주장은 이것입니다. 마침 이 근처에 갵은 백제 토성인 몽촌토성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풍납토성이 사실성의 왕성 역할을 하고, 몽촌토성은 비상시. 그러니까 외적의침입이나 반란시에 들어가 농성할 수 있는 일종의 대피성 개념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성도읍체제인 것이죠.
◈ 아직 진행중
지금 풍납토성의 상황은 진행중입니다. 삼표 레미콘 공장은 이전되었고 , 이미 성 안 몇군대는 발굴도 끝나 "풍납백제역사공원" 같은 공원이 조성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단독주택과 아파트, 2개의 초등학교가 성 안에 남아 있습니다. 갈 길은 아직 멀었습니다.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 게다가 몇조원 하는 토지보상비도 문제죠.
하지만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부지 매입과 연구가 이루어 지고 있으니까요. 풍납토성이 다시 한번 일어나는 날까지, 한번 소망해 보자고요.
풍납토성을 간단히 둘러보고 나니 하늘에서 짖굳게 가루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이날 답사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하는데, 일단 다음역인 암사역으로 가보자고요.
2020.03.09 작성
출처:
5호선 건설지 - 지하철건설본부 저
(1) 위례성 - 한국어 위키백과, 2019년 1월 9일 (수) 19:16 편집본
(2) 이난경, 양승우. (2017). 풍납토성 일대 도시형태 변화과정 연구. 서울학연구, (67), 171-238.
(3) 신희권. (2017). 풍납토성과 한성백제의 역사. 내일을 여는 역사, 68(), 128-137.
(4) 류영아, 채경진.「」20173문화재 보존정책에 따른 정부?지역주민간 갈등분석
(5) 史蹟(사적)11號(호) 風納洞(풍납동) 百濟土城(백제토성)훼손 동아일보 | 1981.04.08
(6) 한성 백제의 도성인 풍납土城(토성)에는 밭과 무허가건...경향신문 | 1994.09.29
(7) "아파트 공사장, 금맥처럼 박힌 토기들… 백제 王城이었다" 조선일보 이형구 교수 인터뷰 | 2018.07.26
(8) 풍납토성 백제 유적 발굴 8년만에 재개 한겨레 | 2007-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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